기타바타케 아키이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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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가마쿠라 시대 말기부터 남북조 시대에 걸쳐 활약한 무장이다. 1333년,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노리요시 친왕을 따라 무쓰로 내려가 도호쿠 지방을 통치하며 친지후 쇼군으로 임명되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항하여 교토로 진격, 여러 전투에서 승리했으나, 1338년 이즈미에서 고노 모로나오에게 패하여 2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평가받으며, 료젠 신사, 아베노 신사 등지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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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바타케 아키이에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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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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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北畠 顕家) |
출생 | 1318년 4월 3일 |
사망 | 1338년 6월 10일 |
사망 장소 | 이즈미 이시즈 (현재의 오사카) |
직업 | 진북장군(鎮北将軍) |
활동 기간 | 1333년 - 1338년 |
알려진 업적 | 겐무 신정 붕괴 후 남조 세력의 주요 인물 남조를 위한 군사 활동 |
관직 | |
겐무 신정 | 종2위(従二位) 우위문독(右衛門督) 검비위사 별당(検非違使別当) 곤노주나곤(権中納言) 진수부 장군(鎮守府将軍) |
남조 | 곤노주나곤(権中納言) 무쓰노다이스케(陸奥大介) 진수부 장군(鎮守府将軍) 추증 종1위(従一位) 우대신(右大臣) |
가문 | |
씨족 | 기타바타케 씨 |
부모 | 아버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北畠親房), 어머니: 불명 |
형제자매 | 아키이에 아키노부(顕信) 아키요시(顕能) 가라하시 아키오(唐橋顕雄) 아키코(顕子) 레이제이 모치사다(冷泉持定) 부인 |
배우자 | 히노 스케토모(日野資朝)의 딸 (하기노쓰보네(萩の局)?) 마쓰시로노가타(松代の方) |
자녀 | 기타바타케 아키나리(北畠顕成) 기타바타케 모로아키(北畠師顕) 딸 (안도 사다스에(安東貞季) 부인) 무라카미 모로키요(村上師清)? |
기타 정보 | |
신호 | 기타바타케아키이에노미코토(北畠顕家命) |
계명 | 조코지 도온(長興寺道音) |
묘소 | 오사카 시(大阪市) 아베노 구(阿倍野区) 오지초(王子町)의 기타바타케 공원 오사카 시 아베노 구 기타바타케(北畠)의 아베노 신사(阿部野神社) 후쿠시마 현(福島県) 다테 시(伊達市) 오이시(大石)의 료젠 신사(霊山神社) |
주군 | 고다이고 천황 → 요시히토 친왕 (후의 고무라카미 천황) |
2. 생애
1333년, 아키이에는 여섯 살 된 고다이고 천황의 여덟 번째 아들 노리나가 친왕(노리요시라고도 함)을 수행하여 무쓰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친왕은 무쓰와 데와의 총독이 되었고, 이 두 지방은 현재 도호쿠 지방으로 알려진 혼슈 북동쪽 끝의 대부분을 구성했다.[1]
같은 해 4월, 친지후 쇼군에 임명되었다. 이 직책은 200년 전 미나모토노 요시이에가 맡았던 자리였다. 유키, 다테, 난부, 소마, 다무라 가문 등 여러 가문이 그의 지휘 아래 연맹을 결성하여 남조를 지지했다.[1] 그러나 소마를 비롯한 몇몇 다이묘들은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의해 설득되어 편을 바꾸었다.
3년 후, 닛타 요시사다의 군대를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대항하여 지원하기 위해 노리나가의 지휘 아래 명목상 군대를 이끌고 교토 외곽으로 갔다. 닛타와 기타바타케는 엔랴쿠지 승병의 지원을 받았고, 아시카가 다카우지를 지원했던 미이데라 사찰의 승려들은 불에 탔다.[1]
1337년, 기타바타케는 규슈에서 남조에 대한 지원을 모았고, 북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고다이고 천황의 명령에 따라 교토 남쪽에 있는 그의 군대를 지원하러 갔다. 많은 전투에서 북조와 싸우며 군대를 천천히 남쪽으로 이끌었고, 가마쿠라를 점령하기 전에 톤 강에서 패배했다. 아시카가 막부의 수도였던 가마쿠라를 점령한 후, 나라로 향하여 이가와 세키가하라에서 싸웠다. 나라에서 군대를 쉬게 하고 재정비하려 할 때 고노 모로나오의 공격을 받아 가와치국으로 피신했다. 덴노지 (현 오사카 근처)에서 적군을 돌파했지만, 1338년 이즈미에서 스물한 살의 나이로 패배하여 사망했다.[1] 그의 죽음은 ''다이헤이키''와 그의 아버지의 ''진노 쇼토키''에 묘사되어 있다.[1]
그의 신은 후쿠시마현 다테시의 료젠 신사와 오사카의 아베노 신사에 안치되어 있으며, 이 두 곳 모두 겐무 신정의 15사에 속한다.[2]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묘는 오사카의 아베노 신사 근처에 있다.[2]
2. 1. 유년기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1318년 3월 2일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장남으로 태어났다.[47] 아버지 지카후사는 노치노 산보라 불리며 고우다 천황, 고다이고 천황의 측근이었다.
1321년 1월, 아키이에는 3세에 작위를 받았고, 이후 여러 관직을 거쳐 1332년 종3위 산기 겸 사콘노에노츄조가 되었다.[47] 14세에 산기 자리에 오른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으며, 나카하라노 모로모리의 일기 《모로모리키》에는 1257년 15세로 산기가 되었던 시조 다카아키와 함께 "어린 나이에 산기로 임명된 사례"로 기록되어 있다.
1331년 3월, 고다이고 천황이 사이온지 긴무네의 기타야마 저택 행차에 아키이에도 동행하여 료오 춤을 추었다.[47] 《마스카가미》에 따르면, 고다이고 천황도 피리를 불었고, 춤을 마친 아키이에에게 전임 간파쿠 니조 미치히라가 홍매색 웃옷과 남색 옷 두 벌을 상으로 주었다고 한다.
아키이에는 일본 역사상 최연소 산기 임명이라는 전례 없는 승진을 보였으며, 아버지처럼 순조롭게 출세했다. 이는 기타바타케 가문이 구니히토 친왕 시절부터 다이카쿠지 왕통과 깊은 관계였기 때문으로 보인다.[49]
2. 2. 무쓰 하향과 도호쿠 통치
겐코 3년/쇼쿄 2년(1333년) 5월,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교토의 로쿠하라 단다이를 무너뜨리고, 닛타 요시사다가 가마쿠라 막부를 멸망시킨 뒤, 아키이에는 아버지 지카후사와 함께 겐무 신정을 보좌하였다.[50][47] 같은 해 8월 5일, 종3위 무쓰노카미가 되었다.[51][52][47] 10월 10일에는 정3위로 서임되고,[53] 10월 20일 고다이고 천황의 아들 노리요시 친왕을 받들어 아버지와 함께 무쓰국 다가 성(多賀城)으로 내려갔다.[54][47] 11월 29일에 다가 성(일본 미야기현 다가죠시)에 도착하여 도호쿠 지방의 통치를 시작하였다.[55][47]이듬해 겐무 원년(1334년) 8월, 쓰가루에 있던 호조 씨 잔당 추토를 시작하였다.[56] 11월 19일에 이들을 멸망시켰고, 12월 17일에는 쓰가루 평정의 공적으로 종2위에 서임되었다.[57][47][52]
겐무 2년(1335년) 11월 12일, 진주후쇼군에 임명되었다.[58] 이보다 앞선 7월에는 나카센다이의 난이 발발하였는데, 8월까지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이 난을 평정하였다.[52][47] 같은 달 30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시바 이에나가를 오슈 간레이로 삼았는데,[59] 이는 아키이에를 견제하기 위한 것이었다.[47]
2. 3. 아시카가 다카우지와의 전투
1335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겐무 신정에 반기를 들자,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노리요시 친왕을 받들어 오슈(奥州) 군사를 이끌고 상경(上京)하여 다카우지 군과 전투를 벌였다. 태평기는 당시 아키이에 군의 병력이 5만에 달했다고 기록하고 있다.[60][52]1336년 1월, 아키이에군은 가마쿠라를 점령하고, 도토미, 오미를 거쳐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와 합류했다. 아키이에군은 하루 평균 40km를 이동하는 강행군으로 비와 호를 건너 닛타, 구스노키와 합류, 전략 회의를 열고 고다이고 천황을 알현했다.[61][47]
아키이에와 요시사다의 연합군은 온조지를 공격해 아시카가 군을 격파하고, 고노 모로나오와 세키야마에서 전투를 벌였다.[62][47] 1월 27일부터 30일에 걸친 전투에서 요시사다, 마사시게와 함께 다카우지를 교토에서 몰아냈다.[47]
2월 4일, 아키이에는 우에몬노카미(右衛門督) 겸 게비이시벳토(検非違使別当)에 임명되고, 다음 날 진주후다이쇼군(鎮守府大将軍) 칭호를 받았다.[63][52][47] 같은 날 아키이에는 요시사다와 함께 다카우지를 추격하여 셋쓰 등 각지에서 전투를 벌인 후 교토로 개선했다.[47]
2. 4. 무쓰 귀환과 재차 상경
1336년 3월 2일, 아키이에는 곤노주나곤(權中納言)에 임명되었고,[64] 3월 20일(또는 24일) 아시카가 측 무사를 토벌하기 위해 무쓰로 돌아갔다.[47] 그 귀환길에 사가미에서 아시카가 측의 시바 이에나가의 방해를 받았으나 4월에는 이를 쳐부수었다.[65][47] 5월에는 소마 씨를 쳐부수고 오슈로 귀환하였다.[66][47]1337년 1월, 아버지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로부터 이세로 원조하라는 문서를 받았다.[3] 같은 달 8일, 아키이에는 국부를 레이잔(후쿠시마현다테시 및 소마시)의 레이잔성으로 옮겼다.[23][8][3] 같은 무렵, 고다이고 천황으로부터도 전년 12월에 보내진 교토 탈환의 윤지가 도착했고,[24] 칙명을 받은 아키이에는 25일에 봉답서를 보냈다.[25][3]
8월 11일, 아키이에는 요시나가 친왕을 받들고 레이잔성을 출발하여 상경하기 위해 다시 남하했다.[26][8][3] 8월 19일, 아키이에 군은 시라카와 관을 넘어 시모쓰케에 들어가 다테 유키토모, 나카무라 쓰네나가의 군을 중심으로, 12월 8일에는 아시카가 측의 고야마성을 함락시키고, 고야마 도모사토를 사로잡았다.[8][3] 아키이에는 아시카가 측의 대군을 12월 13일에 도네가와에서(도네가와 전투), 12월 16일에 아보하라에서 각각 격파했다(아보하라 전투)[27][3].
12월 23일, 아키이에가 이끄는 군세는 가마쿠라를 공격, 다음날 24일까지 이를 공략했다(스기모토성의 전투)[27][3][8] 이때 시바 이에나가는 토벌되었고, 아시카가 요시아키라, 우에스기 노리아키・모모이 나오쓰네・다카시게 시게모치 등은 가마쿠라를 버리고 보소 방면으로 탈출했다.[28][8]
2. 5. 닛타 요시사다와의 제휴 문제
1338년, 아키이에는 가마쿠라에서 서쪽으로 진군했으나, 닛타 요시사다와의 연합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태평기》는 아키이에가 요시사다에게 지휘권을 넘기기 싫어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77]일본의 사학자 사토 신이치는 아키이에나 그의 아버지인 지카후사 모두 자신의 귀족 신분에 대한 자의식이 강하였고, 무사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요시사다와 합류하는 것을 싫어했던 것이라고 한다.[78] 또한 이때 기타바타케 군에 있던 호조 도키유키에게 있어 요시사다는 일족의 원수였고, 그가 요시사다와의 합류를 강하게 반대했기 때문에 성사되지 못했던 것이라고 해석하고 있다.[79]
그러나 사토 신이치의 견해에 대해 오쿠토미 다카유키는 기타바타케 군에는 요시사다의 차남인 요시오키도 있었으므로 호조 도키유키가 요시사다에 대해 어떤 적의나 원망을 품었을 리는 없고, 도키유키가 요시사다와의 합류를 반대했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고 반론하였다. 또한 《태평기》의 묘사에 대해서는 아키이에는 요시사다에게 지휘권을 넘기는 것을 꺼려서 진군 절차를 바꿀 인물도 아니고, 나아가 아키이에가 요시사다보다도 관직이 높았기 때문에 지휘권을 넘기고 말고 할 위치도 애초에 아니었을 것이라며, 명백히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79]
요시사다와 아키이에 사이에 대립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사료상으로는 명확하게 읽어낼 수가 없다.[80] 또한 에치젠으로 향했다고 해도 그 가는 길도 험난한 길이었고, 미네기시 스미오에 따르면 그 노정의 곤란함으로 볼 때 에치젠으로 향한다는 선택지는 아키이에가 생각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81] 오쿠토미 다카유키는 사토 가즈히코의 견해를 「정곡을 찌른 견해」라고 평가하면서 아키이에는 일부러 길을 틀어서 아시카가 측의 눈길을 끄는 동시에 요시사다가 거병할 시간을 벌어 주려고 한 것은 아닐까 하는 견해를 내놓았다.[82]
한편으로 미네기시 스미오는 오히려 합류를 거절한 것은 요시사다 쪽으로, 요시사다와 기타바타케 부자 사이에는 역시 뭔가 불화가 있었으며, 양자가 서로를 불신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추측하고 있다.[83] 나아가서는 요시사다가 있는 에치젠은 아직 안정되지 않은 상태였고 요시사다는 교토로 상경하는 것보다도 에치젠의 제압, 평정을 중시했다고 생각된다고 하였다.[83] 이 당시 아시카가 측의 공세는 격렬했고, 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때문에 요시사다도 아키이에도 눈앞의 적을 상대하는 것이 고작이었으며 서로 공동 전선까지 전개할 만큼의 여유는 애초에 남아 있지 않았다고 지적하고 있다.[80] 사토 가즈히코는 기타바타케 지카후사는 이세에 세력을 가지고 있었고, 승리했다고는 해도 많이 지쳐있었던 아키이에는 이세에 있는 기타바타케 씨와 관련이 깊은 여러 호족들을 의지하기 위해서도 이세로 향해야 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79]
2. 6. 기나이(畿内)에서의 전투와 최후
1338년 1월 28일, 미노국 아오노가하라 전투(青野原の戦い)에서 아키이에는 슈고들을 모아 편성한 아시카가 군을 격파했지만, 아키이에 측도 많은 병력을 잃고 지쳐 교토 공략을 포기해야 했다.[75][47] 2월에 아키이에는 이세로 물러났다.[76][47]2월 4일,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고노 모로야스 등에게 아키이에군 토벌을 명했다. 2월 14일(또는 16일), 아키이에는 이세국 구모즈 강 및 구시다 강에서 북조군과 싸웠으나 결판을 내지 못했다.[47]
2월 21일, 아키이에는 야마토를 점령했으나, 28일 한냐자카 전투(般若坂の戦い)에서 모모노이 다다쓰네에게 패했다.[76][47] 아키이에는 노리요시 친왕을 요시노로 보냈다.
가와치국으로 물러난 아키이에는 전력을 재건하여 3월 8일 덴노지 전투(天王寺の戦い)에서 승리했다.[84][47] 그러나 3월 13일과 14일에 덴노지와 아베노 등지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하고, 이즈미로 이동하여 전투를 계속했다.[47]
3월 22일, 남조는 아소 고레토키에게 아키이에를 구원하도록 명했으나, 고레토키는 출병하지 않았다.[47]
5월 6일, 아키이에 군은 이즈미 사카이우라의 마을을 불태우고, 5월 8일에는 사카모토 향과 간논지에 성을 쌓았다.[47] 다음날인 9일, 호소카와 아키우지 등 현지 북조 세력과 교전했다.[47]
5월 22일, 사카이우라에서 양군은 격돌했다 (이시쓰 전투).[3] 아키이에 군은 분전했지만, 연이은 전투로 지쳐 있었고, 세토 내해 수군의 지원 공격을 받아 고립되었다. 게다가 아군 원군의 도착 지연까지 겹쳐 열세에 놓여 전군이 궤주했다. 아키이에는 이시즈에서 북조군에 포위되어 낙마 후 전사했다. 향년 21세였다.[3]
3. 사후
기타바타케 아키이에의 죽음은 1338년 윤7월 닛타 요시사다의 죽음과 함께 남조에 큰 타격을 주었다. 반면, 북조 측의 무로마치 막부는 중앙뿐만 아니라 아키이에의 근거지였던 오슈에서도 유리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47]
아키이에가 죽은 후, 1338년 6월 21일 그의 아내(히노 스케토모의 딸)는 가와치국 간신사(간신지)에서 출가하여 비구니가 되어 그의 명복을 빌었다. 윤7월 26일, 그의 동생 기타바타케 아키노부가 남조 측에 의해 진주후쇼군(鎮守府将軍)으로 임명되었다. 아키노부는 9월에 이세 국사인 기타바타케 아키요시를 남겨두고 요시나가 친왕을 받들어 친방 등과 함께 무쓰로 향했으나, 함대는 도중에 폭풍우를 만나 아키노부는 요시나가 친왕과 함께 이세로 돌아갔다.[47]
이듬해, 이세로 돌아간 아키노부는 다시 무쓰로 향해 아키이에가 거점으로 삼았던 료젠 성을 중심으로 활동했다. 하지만, 1347년 료젠 성이 함락되는 등 남조 세력은 점차 위기에 몰렸다. 간노의 소란으로 인해 발생한 북조 측 오슈 관령의 대립을 틈타 다가 국부를 일시 점령했지만, 이듬해 탈환당하여 남조 세력의 회복에는 이르지 못했다.[47]
아키이에의 아들 아키나리는 남조로부터 상당한 후대를 받았다고 여겨지지만, 그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1817년, 마쓰다이라 사다노부가 아키이에의 위령을 위해 료젠에 료젠비를 세웠다.[41]
3. 1. 아키이에를 모시는 신사

메이지 유신 이후, 아키이에의 아버지 지카후사가 저술한 신황정통기(神皇正統記)를 선구로 하는 황국사관(皇国史観)이 「정통한 역사관」으로 확립되면서, 남조에 충성을 다했던 아키이에나 닛타 요시사다, 구스노키 마사시게 등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졌다.[2]
1868년(메이지 원년), 요네자와번(米沢藩)의 유학자 나카야마 세쓰도(中山雪堂)와 의사 니시오 겐슌(西尾元詢)이 아키이에 등의 영령을 모신 신사의 건립 운동을 펼쳤다. 1876년(메이지 9년) 메이지 천황(明治天皇)의 도호쿠 순행을 기회로 무쓰 고쿠후가 한때 위치했으며 겐무 신정과 연고가 있는 료 산이 신사 부지로 선정되어, 1880년(메이지 13년) 6월에 료 산 서쪽 산기슭에 료젠 신사(霊山神社)가 세워졌다.[2] 1885년(메이지 18년)에는 이를 별격관폐사(別格官幣社)의 반열에 두게 하여 겐무 중흥 15사(建武中興十五社)의 하나로 삼았다.
1875년(메이지 8년) 오사카시 아베노구(阿倍野区일본어)에 아키이에를 제향하는 신사가 현지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 이는 1881년(메이지 14년) 11월 16일에 아키이에와 그 아버지 지카후사 두 사람을 제신으로 하는 별격관폐사가 되어, 겐무 중흥 15사의 하나인 아베노 신사(阿部野神社)가 되었다.[2]
이들과는 별개로 에도 시대에 기타바타케의 먼 후손이라고 하는 스즈키 이에쓰구(鈴木家次)라는 사람이 아키이에, 지카후사, 아키노부 삼부자를 함께 이세의 다키(多気)의 신사에 제향하였고, 이를 훗날에 기타바타케 하치만구(北畠八幡宮)라 부르게 되었다. 1881년에 기타바타케 하치만구는 촌사(村社) 기타바타케 신사(北畠神社)가 되었고, 1928년(쇼와 3년) 11월 10일에 별격관폐사로 승격되었다. 이들은 아키노부를 주제신(主祭神)으로 하며 아키이에는 배사(配祀)되어 있다.
4. 인물과 평가
기타바타케 아키이에는 구게 출신이면서도 아시카가 다카우지와 대등하게 싸울 정도의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인,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었다. 또한 젊은 나이에도 여러 세력을 이끄는 정치력도 갖추고 있었다.[3] 닛타 요시사다와 함께 고다이고 천황의 기대를 한몸에 받았다. 센고쿠 시대 다이묘 다케다 신겐이 사용한 풍림화산 깃발은 아키이에가 먼저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아키이에의 용모에 대해서는 '늠름한 미청년'이라는 후세의 전승이 있지만, 당시 기록인 『무어람기』에는 '어리고 가녀린 용모'라고 묘사되어 있어 각색되었을 가능성이 크다.[3]
가이조 도모아키는 아키이에의 원정과 진군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점을 들어 그를 위대한 명장이라고 평가했다.
4. 1.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
고다이고 천황에게 올린 기타바타케 아키이에 상주문은 아키이에가 전사하기 7일 전에 작성된 것으로, 겐무 신정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개혁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3] 총 7개 조로 구성된 상소문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조항 | 내용 |
---|---|
1 | 지방 분권 강화 (무쓰 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지방관의 권한 확대 주장) |
2 | 조세 감면 (백성의 부담을 줄이고 민심을 얻기 위함) |
3 | 은상(恩賞) 남발 중지 (공정하고 투명한 상벌 체계 확립) |
4 | 공평한 인사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 |
5 | 법령 개혁 빈도 축소 (잦은 법령 개정으로 인한 혼란 방지) |
6 | 아첨하는 신하 배제 (정직하고 강직한 신하 등용) |
7 | 기타 (상세 내용 미상) |
이 상소문은 유려한 문장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높이 평가받고 있다.[3] 그러나 내용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구게(귀족)의 편견, 당대인의 시각 등을 고려해야 한다는 지적도 제기되고 있다.
5. 묘소 및 유적
- 사카이시 니시구 기슈 가이도와 이시즈 강 교차 지점 남쪽에 아키이에가 전사했다고 전해지는 곳에 난부 모로유키와 함께 공양탑이 세워져 있다.[42]
- 오사카시 아베노구 기타바타케 공원 내에 아키이에의 묘로 전해지는 묘가 있다. 이는 『다이헤이키』 등 전승에 기초, 사후 약 400년 후 교호 연간에 나미카와 세이쇼의 제창으로 세워졌다.[43]
- 아베노구 아베노 신사는 아키이에를 모신다. 경내에 아키이에 동상이 있는데, NHK 대하드라마 "다이헤이키" 방영 기념으로 1991년 건립, 제막식에는 아키이에 부자를 연기한 콘도 마사오미・고토 쿠미코도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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